Yoon Han Jong

홍익대학교 사진전공 석사

해외 전시

윤한종 작가님께서 올해 9월 미국에서 있었던 FOTOFEST ‘INTESECT_Technology, Belief, and the Enviroment’ 전시회에 참여하셨던 모습입니다.

FOTOFEST는 사진 예술을 일반인들에게 대중적으로 알려야 한다는 목표 아래 1983년에 결성된 최초의 민간단체로서, 유사한 성격의 단체와 전시가 현재 여러 나라에 있으나 그 중에서 가장 파워있는 세계적인 비엔날레가 열리는 곳입니다. 그동안 한국 작가분들 중에서는 구본창 작가님 등 소수의 작가분들만이 전시를 하셨고, 사진 작가님들 사이에서는 이곳에서 전시를 해보는 것이 일종의 워너비 코스 같은 전시회이기도 합니다.

동영상

작가 노트

Invisible Beings – 보이지 않는 존재

사진은 물리적인 존재를 기록하기 위한 발명 도구이다. 사진가들은 사진이 발명된 이후로 오랫동안 동시대의 주요사건과 대상을 광학적 한계 내에서 표현하였다. 그리고 이 광학적 한계 때문에 사진의 기록은 겉으로는 정확한 듯 보여도 완벽한 진실이 될 수 없다. 다만 사진이 촬영자가 관찰하고 인식한 사유의 결과물이라는 것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자연계의 모든 것은 고유의 기능과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존재는 인간의 시각적 한계 내에서만 인식된다. 따라서 너무나 작은 존재는 사람이 인식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시각정보를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유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기계장치를 이용한 고배율 사진은 대상에 대한 충분한 시각정보를 제공하여, 보이지 않는 존재(Invisible Beings)를 볼 수 있는 존재(Visible Beings)로 인식하게 한다. 또한, 미소(微小)하여 개념적으로만 여겨지던 존재(Conceptual Beings)를 실재적 존재(Real Beings)로 편입시킨다.

보이지 않는 존재(Invisible Beings)는 개인 연작(Individual Series)과 사회 연작(Society Series)으로 나뉜다. 개인 연작은 고정도 산업용 카메라를 이용하여 1-4mm 크기의 양품 또는 불량 전자부품을 고배율로 촬영했다. 극단적으로 확대된 정물은 맨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볼 수 있는 존재로 인식하고 사유하게 한다. 이 작업은 전자부품이 사람과 비슷하다는 관점에서 시작되었다. 아무리 완벽한 사람이라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사람의 내면은 실수와 실패, 상처와 아픔으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회 연작은 10,000개의 전자부품을 각 1회씩 촬영하고, 각각의 사진을 오려서 100×100 형식으로 나열한 작품이다. 10,000개의 부품은 개인들이 부대껴서 사는 사회를 의미하며, 각 부품을 실패의 경험을 가진 상처받은 개인이라고 생각하며 작업하였다.

작업 대상인 전자부품은 나에게 있어 오래전부터 생업의 한 요소에 불과했으나, 보이지 않는 존재(Invisible Beings) 작업을 하는 동안 관찰과 사유를 통해 성찰의 대상으로 다시 다가왔다. 이런 대상의 재현은 산업적 목적에 부합하는 이미지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롭게 발견된 존재이며,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빛에 대한 생경한 경험의 표현이다. 이 연작이 관람자들의 생각과 다를 수도 있겠으나, 함께 이 시대 모습에 대해 고민하는 화두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작품 평론

윤한종의기계의시각으로세계상

이영준  <기계비평>

“눈아, 본  것을  부정해라! (Forswear it, sight!)“ ― 윌리엄  셰익스피어, 로미오와  줄리엣  중

엔지니어이자 사업가이자 작가인 윤한종은 기계의 눈이 어디까지 볼 수 있나 알아보기 위해 자신이 다루는 전자부품 검사장치의 정밀한 눈을 이용해 전자부품들을 사진 찍었다. 보기에 단순해 보이는 이 사진들은 오늘날 기술과 시각과 인지에 대한 많은 것들을 함축하고 있다. 우선, 이 사진들이 나오는 과정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사진’이 만들어지는 과정과는 많이 다르다. 물론 이런 기계로 사진 찍는 목적도 다르다. 윤한종이 전자부품 검사장치를 이용해서 사진 찍는 목적은 전자부품의 표면에 있는 결함을 찾아내는 것이다. 옛날에는 제품의 결함을 사람의 눈으로 찾아냈지만 이제 산업현장에서 사람의 눈으로 무엇을 검사하는 시대는 지났다. 전자부품의 표면에 있는 결함을 찾아야 하는 이유와 절차는 상상 이상으로 복잡하다. 그것은 오늘날 복잡하게 발달한 산업의 중요한 측면을 품고 있다. 우선, 왜 결함을 찾아내야 할까? 사실 윤한종의 검사장치가 다루는 전자부품의 단가는 별로 비싸지 않다. 몇천원에서 몇십원 짜리도 있다. 문제는 작은 전자부품의 결함 때문에 고가의 기계장비 전체가 못 쓰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전자부품의 불량률은 그것을 제조한 회사의 신뢰도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결함은 반드시 찾아내야 한다.

전자부품에는 일정한 불량률이 나타난다. 이 불량을 찾아내는 검사는 고속으로, 고정밀도로 이루어진다. 검사장치가 찾아내는 것은 사실 불량 자체는 아니다. 검사장치는 칩의 외관을 검사할 뿐이다. 즉 전자부품의 형태, 크기, 색, 질감에 불규칙한 점이 있는지 찾아내는 것이다. 기계의 눈이 사람의 눈과 다른 점은 기계의 눈은 자기가 관심 있는 것만 본다는 점이다. 전자부품 검사장치는 자신이 검사하는 전자부품이 컨덴서인지 저항인지 관심 없다. 그리고 전자부품이 불량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다. 검사장치는 정해진 규격을 벗어난 것을 찾아낼 뿐이다. 전자부품의 크기가 설계치수와 허용공차를 벗어난 것을 불량으로 처리할 뿐이다. 따라서 검사장치의 눈은 이것저것 다양한 관심사에 사로잡혀 있고 두뇌의 지식과 관심사에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주관적으로 판단하는 사람의 눈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여기서 불량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나쁘다’ ‘잘못됐다’가 아니다. 우리는 흔히 ‘불량’이라고 하면 정성정인 차원에서 생각한다. 그러나 부품 검사장치가 찾는 불량은 철저히 정량적인 것이다. 즉 정해진 규격을 벗어난 것은 무조건 불량으로 치는 것이다. 불량이란 결국 노이즈의 개념이다. 노이즈를 폭넓게 정의하면 원하는 시그널 이외의 모든 신호이다. 따라서 검사장치는 전자부품이 가진 형태와 재질, 색깔의 특성에서 벗어나는 것은 모두 노이즈로 친다.

검사의 절차는 공급(feeding), 검사(inspection), 제외(ejection)의 세단계로 나뉜다. 검사할 전자부품을 카메라 앞까지 날라주는 피더(feeder)는 전자부품을 빨리 보내야 하지만(분당 최대 8000개) 정확하게도 보내줘야 한다. 즉 카메라가 검사하고자 하는 면이 드러나도록 각도를 맞춰줘야 하는 것이다. 전자부품 검사장치의 카메라는 철저한 검사의 스펙에 따라 사용되기 때문에 사용자의 취향이나 감성에 따라 다양한 세팅이 가능한 일반적인 카메라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실 일반인의 카메라는 사용자의 눈과, 나아가 눈을 가지고 있는 몸 전체와 한 덩어리를 이룬다. 그래서 카메라는 몸이 움직이는 데로 따라 움직이면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트리거 센서는 전자부품의 위치를 기록한 후 특정한 상대거리에 있는 카메라에게 자동으로 찍으라는 명령을 주는 신호를 인코더값을 통해 알려준다. 여기에는 전자부품의 속도와 센서와 카메라 사이의 거리 같은 수치들이 계산된다. 그다음 전자부품은 검사부로 넘어간다. 검사장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이다. 특정한 상대위치와 읽힌 인코더값에 의해 전자부품이 도착했다는 신호가 오면 계산에 의한 인코더 값을 읽어서 카메라가 사진을 찍는다. 윤한종은 1.0×0.5㎜ 크기의 전자부품의 경우는 픽셀당 4.9㎛의 해상도를 가지는 1.5배율 렌즈를 써서 6W의 적색 녹색 청색 LED를 각각 다른 각도로 비춰서 찍었다. 조명의 강도와 각도도 중요한데, 전자부품의 표면에 있는 불량을 찾아내려면 옆에서 비스듬히 빛을 비추어 요철이 잘 드러나게 찍어야 하기 때문이다. 1.5배율 렌즈라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크기가 1㎜도 안 되는 전자부품을 1.5배율로 찍는다는 것은 거의 현미경적인 수준의 확대율이다. 찍힌 이미지는 영상처리 알고리즘을 통해 해석되어 정상, 불량 여부를 가리게 된다.

윤한종은 자신이 개발하고 판매하는 이 검사장치를 이용해서 ‘작품’을 만들어냈다. <보이지 않는 존재(Invisible Beings)>라는 제목이 붙은 이 작품들은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1.0배의 배율로 찍은 칩 10000개를 나열한 것으로, 작은 칩들의 이미지 10000개가 나열된 모습은 마치 사회의 축소판을 보는 듯하다. 또 한가지의 작품은 개별적인 전자부품을 극단적으로 확대한 것이다. 400배 정도 확대된 부품들은 이제는 부품 아닌 다른 것으로 보이다. 그것은 원래의 대상이 무엇이었는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된 전자부품의 모습이다. 검사장치의 카메라와 렌즈로 고배율로 확대하여 찍은 전자부품은 전자부품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나무껍질이나 딱정벌레를 닮기도 했다. 워낙 미세한 세계를 확대해 놓으니까 육안으로는 원래 사물의 정체를 알아보기 힘든 것이다. 전자부품의 표면은 육안에는 매끈해 보이지만 고배율로 확대해 놓으니까 온갖 금속의 입자들이 대단히 불규칙하게 울퉁불퉁하게 배열된 것을 볼 수 있다. 그 모습은 차라리 자연에서 발견되는 바위의 표면에 가깝다. 그것은 산업부품이 초정밀로 규격화되어 있고 가공돼 있을 거라는 믿음을 배신한다. 결국 실수와 실패는 아무리 첨단기술이 발달해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본질이었던 것이다.

요즘 흔히들 말하는 ‘과학기술과 예술의 융합’의 측면에서 그렇다면 윤한종의 작업에서 양자는 어떤 식으로 섞여 있었던 것일까? 대부분의 기계들이 그렇지만, 잘 관찰해 보면 예술작품만큼, 혹은 그 이상 아름답다. 예술작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창의성과 감성, 제작의 치밀함이 기계에도 들어 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전자부품을 아주 빠른 속도로 이동시키면서 올바른 자세로 놓여 있게 해주는 피더와 가이드의 메커니즘은 정교할 뿐 아니라 아름답다. 그 메커니즘을 이루는 금속부품은 스케일은 아주 작을지언정 그 표면의 질감이나 광택은 헨리 무어의 조각품 못지않은 깊은 맛을 풍긴다. 1920-30년대에 유럽과 미국 양쪽에서 대상의 디테일이 가진 기묘한 아름다움에 파고든 사진가들이 나왔다. 유럽에서는 독일의 칼 블로스펠트가 다양한 식물의 디테일을 확대 촬영하여 ‘자연 속에 들어있는 예술형상’이라는 제목의 작품을 만들었다. 신객관주의라는 사상에 입각하여, 블로스펠트는 어떤 것도 표현하지 않고 오로지 자연의 객관성을 추구했다. 미국에서는 폴 스트랜더가 기계의 질감과 구조미에 매료되어 있었다. 독일의 사진가들처럼 그도 자신의 주관성은 억제하고 오로지 대상에 들어있는 특성만 강조했을 뿐이다. 그들에게 과학기술은 예술 자체였다. 이런 맥락에서 윤한종이 만들어낸 이미지 속에는 과학기술과 예술이 서로 뒤섞여 있다.

우리는 산업시스템이 똑같은 물건들을 찍어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리 정밀하게 가공해도 오차가 없는 기계나 부품은 없다. 여기서 중요한 존재론적 문제가 등장한다. 근대 이래 서구의 사상이 집중해 온 것은 동일자의 문제였다. 즉 분열된 인간을 하나의 통일된 존재로 규정하려는 것이었다. 나의 외부에서 나와 같은 것을 찾아서 존재의 통합성을 추구하는 것이 동일자의 철학이었다. 그런데 개별 인간만 분열된 것이 아니라 세계도 분열돼 있다. 인종적으로, 지리적으로, 사상적으로,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분열돼 있다. 그래서 서구인들은 분열된 세계 속에서 동일자를 찾고 그 안에 들어 있지 않은 것은 타자로 규정해 버렸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남이가’의 철학을 가지고 ‘우리’라고 동일시되면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으면 타자라고 내쫓아 버렸다. 그게 서구 근대의 역사다. 그것은 사상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 세계를 실제로 동일자들의 터전으로 만드는 실천의 문제이기도 했다. 그런 사상과 실천의 역사는 근대 산업에 와서 제대로 실현되는 듯이 보였다. 인간의 의도대로 동일한 것을 마구 찍어 낼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산업제품들은 대강 보면 다 똑같은 것 같다. 그러나 바싹 들여다보면 가공오차가 있고 불량이 있다. 그래서 동일자의 철학은 아주 미세한 차원에서 금이 갔다. 윤한종의 작품은 바로 그런 심오한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